[시집] '아라리 정선 아라리' - 진용선 독서 일기 - 시와 소설



진용선, 여명출판사, 1995년 발행

그해 겨울의 詩

건성으로 눈이 내렸다
두 손 호호 불며 기다리던 약속은 깨졌고
겨울이라 더 많이 하게 되는 생각
뒤를 돌아보며 느릿느릿 돌아와
라면을 끓이고
연탄불을 갈았다
고만고만한 외로움쯤은 익숙한
시린 손으로

- 진용선, 아라리 정선 아라리(1995)

고등학교 선배이고 문예동아리 선배인 진용선 시인은 평생 정선 아리랑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현재 국내 아리랑 연구의 대가가 되었으며, 김영삼 정권때는 대통령 표창인 신한국인상을, 근래에는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내가 그를 만난것은 1996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와 문예부 친구들은, 진선배가 여름이면 열던 '정선 아리랑 캠프'에 자원봉사를 갔었다. 나와 원석과 주봉과 병헌 이렇게 넷이었다. 예미초등학교에서 열렸던 3박4일의 그 일정은 내게 고교 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당시 봉사활동을 함께 했던 함백여고의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고. 그중 한 친구와는 그 후로도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 얘기가 옆으로 새버렸군

유니폼

실오라리마다 깃든 힘이 있어 쉬어자세에야 눈에 힘 뺄 때 식반들고 버젓이 줄을 섰을 때 생각해봐 완벽하게 굴복하는 부끄러움을 
일단 벗어제끼면 홀가분 소리지를 자유야 있겠지만 끗발없이 벅찬 우리네 삶은 어떡하나 배고픔은 더 완전한 속박을 요구하고 서서히 길들여진 우리네 침묵 무엇일까 훨훨 벗지 못하는 껍데기는 

 - 진용선, 아라리 정선 아라리(1995)

진선배는 인하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나왔다. 지금은 가장 한국적인 아리랑을 연구하지만 그는 사실 독문학도였다. 글쓰기도 좋아해서 대학시절 MBC청소년문학상과 전국 대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 같은해 문예잡지 '심상'의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아리랑 학교에서 돌아오던 날, 진선배는 자신의 시집을 우리에게 한 권씩 건냈다. 시집 제목은 '아리리 정선 아라리'

오늘 실로 오랜만에 시집을 펼쳤다. 고교시절 정말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집의 전반부는 '아리랑'과 '강원도 정선'에 관한 작품들이, 후반부는 시인의 사색과 통찰이 내밀한 언어로 펼쳐진다. 고교시절에 읽을 때는 전반부가 좋았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후반부의 시들에 눈길이 간다. 진선배의 삶에서 '정선 아리랑' 이야기를 빼면 안되겠지만, 그 얘기를 잠시 뒤로 하고라도, 그는 충분히 좋은 시인이 아닌가 싶다.

대화
- 용호에게

깎아 논 사과조각에 녹물이 들 때까지 대화는 지독히 야위고 있었지 속살을 드러냈지 접시 위 반짝이는 포크가 어쩌자구 파상풍에 걸려 썪었는지 혹은 썪는 중인지 끝끝내 알지 못하던 밤 번번히 들통나던 넉넉한 밤에 

 - 진용선, 아라리 정선 아라리(1995)

아, 그시절 아직 어린 꼬마였던 진선배의 아들 하림이는 얼마나 컸을까. 그때 당시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곱살이었다고 치면 지금 스물여섯살이 된 건가. 그 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겠구나.

행복한 귀가

캄캄한 겨울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가슴 속 두둑한 지갑을 감춘 사람들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깊은 시름, 마음의 가뭄 따위는 
향기로운 담배연기에 날려버린 듯 합니다 
그러나 내 깊은 주머니 속엔
쓸쓸한 어둠의 조각들만 채워져 있습니다 
거스름 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
알아주지 않는 직함의 명함 서너 장
보름 전에 산 전화카드 한 장 뿐입니다. 
정선역에서 예미역까지 
문인수의 시집을 읽으며 오는 한 시간 
부서진 별들이 차웁게 따라왔습니다
폐광촌의 떠나지 못하는 불빛을 보며
더 깊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조그만 역
긴 그림자 위에도
볓빛 총총 쏟아집니다
대합실을 나오자 
마중나온 아내와 아들 하림이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 진용선, 아라리 정선 아라리(1995)


(2015.05.30)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