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박찬욱 & 김지운 대담 옮겨 놓고 싶은 구절들

김지운: 모 잡지에 실린 박 감독 사진 보니까 전날 밤 술 많이 했는지 눈이, 거의 한번 빼서 술에다 담갔다 다시 끼운 안구 같더라.

박찬욱: 배우들과 매일같이 술 많이 했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인터뷰어와도 좀 마시고. 요즘 본 영화 중에는 DVD로 본 '존 말코비치 되기'가 최고다.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막히더라. 서플먼트는 또 어떻고. 조수석에 앉은 기자가 질문하며 캠코더로 찍고 감독이 운전하면서 대답하는데, 상투적인 일련의 질문에 줄곧 메슥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예 차를 세우고 마구 토하는 게 아닌가! 기자들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연출한 조크겠지만.

김지운: 나도 얼마 전 잉마르 베리만과 그의 오랜 동료였던 요셉슨이라는 사람의 대담을 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압권은 ‘평론가 폭행사건’에 관한 수다였는데, 베리만의 평론가에 대한 증오심이 '복수는 나의 것' 수준이더라. 내가 폭력을 가했지만 언어폭력도 신체에 가해진 폭력 이상의 상처가 된다면서. “우발적이었나?” 물으니 “아니,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고 “고인이 됐지만 그놈은 정말 죽일 놈이었다”고 못 박았다. (웃음) 당시 평론가협회에서는 회의를 하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베리만은 82살, 요셉슨은 77살인데 그 연배의 두 대가가 만나서 죽음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 하고 여자이야기만 30분 이상 낄낄거리면서 했다.


김지운: 그래도 <복수…>에는 와이드를 쓴 양식적인 앵글이나 기괴한 조형감, 인물을 포진시키는 방법, 양식화된 캐릭터 설정 등등 현실을 악몽으로 치환시키는 일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있다.

박찬욱: 사실 광각렌즈도 너무 감독을 내세우는 것 같아 피하려 했는데, 떨어져 있는 인물을 잡기 위해서는 심도가 필요한 나머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더라. 심도는 확보되지만 양식화된 느낌, 과장된 거리감이 생기니 고민이었다. 그런데 또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양식화된 화면이 싫지 않은 거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면서 내심 좋아했던 거겠지.

김지운: 장면묘사나 전개가 현실의 숨막히는 압박감을 전하면서도 매순간 이것은 어쨌든 유머라는 점을 자꾸 노출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밖에서는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거나. 알게 모르게 감독의 존재와 의도를 상기시키는 터치들이 보였다.

박찬욱: 스타일을 추구한 건 아니지만 잘 구도 잡힌 단정하고 엄숙한 화면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서 어떤 감독은 흐트러지고 꾸밈없는 앵글을 선호할 수도 있겠고 미학적으로 미결된 그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나 결국 지금처럼 해야 관객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씨네21, No.346, 김지운이 박찬욱에게. '복수는 나의 것'을 따져 묻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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