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나 마찬가지 - 박완서 옮겨 놓고 싶은 구절들

그가 아저씨네 공장에서 박기사로 일할 때 백여명의 공원들 사이에선 크고 작은 사고가 그치지 않았다. 거의 다 공원들 실수지 기계가 잘못한 건 아닌데도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책임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걸로 공원들 사이에 평판이 나 있었다. 그건 까딱하단 남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는 약점인데 공원들을 그를 깔보지 않고 좋아하고 따랐다. 남의 몸이 다치거나 아파하는 걸 차마 못 보는 측은지심은 어디서 배우거나 흉내낸 교양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 같은 거여서 잘 통했던 것 같다. 한번은 여공의 네 손가락이 절단기에 잘린 적이 있는데 감독이나 절단기 책임자 다 제쳐놓고 그가 나서서 신속하고 냉철하게 대처하는 태도에는 평소의 그에게 있을 것 같지 않은 카리스마까지 있었다. 119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을 때 그는 기절한 소녀의 손에서 잘려나간 손가락의 청결을 최대한으로 유지해 깨끗한 거즈에 싸고 부패하지 않도록 얼음에 채우라고 명령했고 다들 벌벌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를 때 나는 마치 그의 입속의 혀처럼 그의 명령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이 신속과 정확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거로구나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는 근처에 있는 공단 단골 병원 다 제쳐놓고 사장 차를 무단으로 손수 운전해서 부천에서 머나먼 구로동까지 갔다.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거기 있는 큰 종합병원에 절단된 손가락을 감쪽같이 이을 수 있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진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이 성공해 소녀의 손가락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났을 때 그는 거의 생색을 내지 않았지만 걱정하던 동료들은 울고불고 박수 치고 난리를 쳤다. 내가 그때 선배 언니의 표정에서 기대에 어긋난 것같은 실망의 빛을 보았다면 내 심보가 너무 꼬였던 것일까. 언니가 소녀의 회복보다는 그 일을 기회로 동료들의 분노를 총집결해 불을 지필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손발이 척척 맞던 그 일치감은 몸의 기억일까. 마음의 기억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망설임 없이 너무도 쉽게 그와 몸을 섞고 동거에 들어간 이유는 그때의 기억 때문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다. 그러나 기남이는 지금도 그 일에 대해 덤덤하다.
- 박완서, '거저나 마찬가지'中

그들은 이제 이 집을 전세놓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대놓고 별장이나 주말 농장 취급을 했다. 종당에는 내가 침실로 쓰던 안방까지 내주게 되었다. 몇 쌍이 부부 동반으로 놀러왔다가 언니네 부부만 쳐지더니 자고 가겠다고 해서 내가 안방으로 쓰던 방을 내줘야 했다. 자보니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어려운 후배가 결혼하면 여기 와서 첫날밤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거저나 마찬가지의 함정은 이렇게 바닥도 끝도 없었다.
- 박완서, '거저나 마찬가지'中

"아이를 갖자고? 꿈도 크다. 네 나이가 몇살이냐?"
"너 날 모욕했어. 장화만 벗으면 용서해줄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니까."
"우리처럼 못난 부모 만나는 애가 불쌍하잖아"
"못난 건 아네. 못났으니까 자식 덕이라도 좀 보자는 거야. 아이가 우리에게 비빌 언덕이 될지 누가 알아. 우리는 아이 핑계로라도 달라져야해. 어떡하든지 달라지고 싶어. 거저는 사절이야. 우리 거저 근성부터 고치자. 응? 싦음 그만두고"
나는 그가 머뭇거리지 못하게 얼른 그의 손에서 길 잃은 피임기구를 빼앗아 내 등뒤에 깔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눈높이로 기남이의 얼굴이 떠오르든 때죽나무꽃 가장귀가 떠오르든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끝)
- 박완서, '거저나 마찬가지'中

박완서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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