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 박완서 옮겨 놓고 싶은 구절들

바퀴가 불안전하게 탈탈거리는 손수레에 피난 보따리와 올망 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태우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번갈아 밀며 글며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 본 폐허의 서울 - 그땐 하늘이 낮고 부드럽게 흐려 있었고, 눈이 조금씩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었고, 폐허 사이에 도괴를 면하고 제법 의젓하게 서 있는 건물들도 창문이란 창문은 화염을 토해낸 시커면 그을음 자국으로 아궁이처럼 음험하게 뚫려 있었고, 북으로부터의 포성이 바로 무악재 너머에서 나는 듯 가까웠고, 사람들은 이고 지고 총총히 총총히 이 고장을 등지고 있었다.
아침 느지막이 중학다리 집을 떠나 종로 광교 을지로 입구 남대문까지 우린 너무 느리게 걸었고, 어머니가 이렇게 굼벵이처럼 걷다가 해 안에 한강도 못 건너겠다고 걱정을 하는 바람에 이제부터 앞만 보고 기운 내서 열심히 가야겠다고, 마지막 돌아보는 셈 치고 돌아다본 시야에 문득 남대문이 의연히 서 있었다.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볼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 넘쳤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가슴이 더워왔다. 남대문의 미의 극치의 순간을 보는 대가로 이 간난의 피난길이 마련되었다 한들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건 결코 안이하게 보아질 수 없는, 꼭 어떤 비통한 희샹의 보상이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中

산 너머에 부대가 생겼다는 소문은 빠르게 온 동네로 퍼졌다. 큰 살판이나 난 듯한 이상한 활기가 이 피난민과 원주민이 3대1쯤인 마을에 넘쳤다. 벌써 아이들은 산나물을 넣고 끓인 멀건 수제비국에대 코를 들이대고 킁킁대면서 누르께한 육기(肉氣) 냄새를 맡지 못해 안달을 해왔다. 그러나 먼저 퍼진 것은 육기나 기름기가 아니라 느글느글한 화냥기였다. 마치 항구에 정박한 큰 선박에서 폐유가 흘러나와 항구의 해수를 오염시키듯 이 미군 콘셋에서 흘러나온 수상쩍은 에로티시즘이 단박에 온 마을을 뒤덮었다. 이상한 그림이 나돌고, 계집애들은 엉덩이를 휘젓는 망측한 걸음 걸이로 괜히 히죽히죽 웃으며 싸다니고, 아이들까지 혀 꼬부라진 소시를 한두 마디씩 지껄이며 양키만 보면 팔때기를 걷어붙이고 이상한 흉내를 냈다.
-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中

"이년아 똑똑히 봐둬라. 이 인정머리 없는 독한 년아. 이 에미 꼬락서니를 봐두란 말이다. 어디 양갈로 짓이라도 해먹겠나. 어느 눈 먼 양키라도 뎀벼야 해먹지. 아무리 해먹고 싶어도 이년아. 양갈보 짓을 어떻게 혼자 해먹니. 우리 식군 다 굶어 죽었다. 죽었어. 이 독살스러운 년아. 이 도도한 년아. 한강물에 배 떠나간 자국 있다던? 이 같잖은 년아"
나는 무서워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순간 내 내부의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이 영영 두터운 딱지를 붙이고 말았을 게다. 제 딸을 양갈보 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 할 수 있을 것인가.
-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中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 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中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토록 잔혹하고도 처연한 이야기를 담아내다니.
기록되어야 할 역사, 기억되어야 할 삶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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