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상춘곡 - 윤대녕 독서 일기 - 시와 소설


"고3때 진로를 바꾸기도 하구요, 왜요. 갑자기 물감이 싫든가요?"
"그땐 세상이 다 흑백으로 보였기 때문에 물감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오더군요"
"그런 증상도 있어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에 따라선 분명 그런 증상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천문학으로 전공을 바꿀거란 얘기도 사실인가 보내요?"
"모든 일이 그렇게 사실과 비사실로 나누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 중간이라는 것도 있고 눈으론 당최 안 보이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요컨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도 다 그렇게 생겨먹질 않았습니까. 이를테면 지금도 나는 캄캄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 지금 절 유혹하는 거에요?"
나는 봉숭아 꽃물을 들인 것 같은 당신의 손톱을 내려다보며 되받았지요.
"아까부터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 엉터리 같은 자식! 하고 당신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지요. 한데 그 순간 왜 내 마음속에서 당신에 대한 연정이 불같이 치솟았는지 모릅니다. 포장마차 안에서는 카바이트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지요. 당신은 금세 낯빛이 창백해져 짐승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습니다. 화도 나고 당황도 했겠지요.
아까처럼 소주 반병이 남았을 때 당신과 나는 포장마차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은 봉천동에 있는 이모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이틀 후 고창으로 다시 내려갔다가 개학할 때쯤 서울에 올라올거라는 얘기였습니다. 택시 정류장으로 찾아 내려가며 내가 슬그머니 어깨에 손을 두르자 당신은 가만히 있는 대신 또 가시 돋친 말을 던져 왔지요.
"흥, 겨우 교양학부 때 읽은 에리히 프롬 따위를 가지고 수작을 걸어. 전공과목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안그래도 방금 전공과목을 확실히 정한 참입니다. 최란영 당신으로 말입니다."
"머리털부터 기르시지 재수생 아저씨! 수강 신청은 받지도 않을테니."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순간 나는 당신의 멱살을 잡고 가게 셔터에 다 밀어붙였지요. 누가 보면 아마 술 취한 노상강도쯤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셔터가 내 힘에 밀려 당신 등에서 금속음으로 마구 출렁거렸지요.
"내일 당장 내가 먼저 선운사로 내려가겠다! 머리를 밀고 석상암에 들어가 있을테니 유급을 시키든지 너도 전공을 바꾸든지 맘대로 해! 안 그러면 내 평생 네 집 앞을 지나며 목탁을 두드려 댈 테니"
당신은 벌벌 떠는 얼굴로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더니, 하지만 때가 좋지 않잖아요, 라며 겨우 달래듯 대꾸했지요.
"하필이면 왜 이런때 사람한테 승부를 걸어요"
내 때는 내가 알아서 정해! 라고 나는 물러서지 않고 당신을 내처 몰아붙였지요. 그러고 나서도 모자라 협박조로 또 이랬을 겁니다.
"이봐, 사람 잘못 봤어. 전공만 확실히 정해지면 나 거기다 목숨 거는 사람이야!"
그게 얼마간 억지였다 해도 그때 내 마음이 그랬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굳이 혼자 가겠다는 당신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다음 나는 골목 끝에 서서 울컥울컥 생소주를 토하며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다지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무모한 사랑 때문에.

내가 윤대녕을 잘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상춘곡'은 이제 까지 읽은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았다. 가끔 이렇게 마치 내 얘기인 것만 같은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때 가장 가슴이 저며온다.

그런데 나는 확실히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하숙집 형들의 영향 때문일까.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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